해인사의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해인사 길상탑
길상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 석탑양식을 갖춘 탑으로 2층의 기단을 지니고 있으며, 특이한 점은 상층 기단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낮고 넓어서 상당히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옥개받침은 각각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는 노반(露盤)이상이 결실되었으나 노반에 지름 5.2㎝ 정도의 찰주(刹柱)를 꽂았던 원형 구멍이 남아 있다.
이 탑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소탑이 157개가 있으나 완전한 수량이 아니다. 이는 이 탑의 건립이 탑지(塔誌)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조탑경(造塔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소탑은 원래 99개, 77개가 안치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망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4매의 탑지는 23㎝의 정방형으로 두께 2.4㎝의 검은 전판(塼板)으로 만들어졌는데 명문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찬(撰)한 것으로서 유명하다. 즉 건령(乾寧) 2년(신라 진성여왕 8년, 서기 895)을 전후한 7년에 걸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창궐한 도적떼로부터 사보(寺寶)를 지키기 위해 힘쓰다 희생된 승속(僧俗)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했다는 사실과 함께 탑의 높이, 공장승(工匠僧), 탑 안에 납입한 법보(法寶)의 내용 및 탑을 건립하는데 소용된 비용 등을 기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탑의 높이를 일장삼척(一丈三尺)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나 현재 탑의 높이를 3m로 볼 때 이 탑의 조성에 당척(唐尺)이 적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도량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탑지의 기록에 따라 석탑건립에 소요된 비용과 물품 등은 당시의 사원 경제연구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 및 소요된 비용 등의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 혼란된 사회상을 비롯하여, 경제상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고 있다.
문화재의 보고 해인사에 대하여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연유되어 법보종찰로도 유명하다. 고려 태조는 이 절에 머물렀던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전지 500결을 하사했다.
해인사는 법보종찰이요, 화엄십찰의 하나이다. 최치원의 가야산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의하면 해인사는 순응, 이정 스님에 의하여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는데, 그때 왕의 조대비 성목태후가 대시주였다고 한다. '해인'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인사는 화엄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도장이다. 해인사를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이라 부르는 것은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고려대장경판인 법보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는 대장경판전, 대적광전, 명부전, 독성각, 응진전, 응향각, 퇴설당, 해행당, 심검당, 궁현당, 경학원, 적묵당, 관음전, 구광루, 보경당, 대장경보전연구소, 명월당. 사운당, 청화당, 범종각, 우화당, 해탈문, 천왕문, 일주문 등 많은 전당이 있다.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문화재 정보]
지정번호 : 보물 제1242호
지정연도 : 1996년 5월 29일
소장 : 해인사
시대 : 통일신라시대
크기 : 높이 3m
분류 :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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